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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17일 충청북도 충주시 경찰서 안에 앳되보이는 여성이 초조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좀전에 막 집에 강도가 들었다며 피해자 신분으로 경찰서에 도착한여성이였습니다.

동시에 함께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 갔죠.
그녀의 아버지는 가슴 부위에 칼을 맞아 매우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잠시후 사건을 담당받은 형사가 여성에게 다가와 소식을 전했습니다.

'제가 방금 병원에 다녀와 아버지 상태를 보고왔는데, 목숨엔 지장이 없으시더라고요.'
이 말에 여성의 반응이 매우 당황스러웠죠.
의망을 잃은 듯 털썩 자리에 주저 앉아 울부짖었습니다.
'안돼요. 안돼요' 여성의 아이러니한 모습은 당연히 앞에 있던 형사에게 포착됩니다.

그리고 즉각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죠.
우선이 여성은 만 19세 였던 김보은양 강도사건의 피해자의 의붓딸이기도 했습니다.
사건 이틀후인 1월 19일 경찰은 수사 끝에 한 남성을 이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김보은 양과 면식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죠.
그렇게 경찰서에서 용의자와 맞닥들인 김보은양은 또한번 오열합니다.
'형사님 이 남자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범이 이예요'


경찰에 체포된 남자는 21살의 김진관 김보은양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오랫동안 교재해온 연인사이였죠.
김보은양의 자백으로 이 두사람이 의붓아버지를 살인한 정황이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김진관은 범행의 전날 서울 창동 시장에서 식칼과 공업용 테이프, 장갑을 구매했죠.

후에 그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범행시간을 새벽1시 30분쯤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김양은 자택 문을 열어 주었고, 김진관은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김군은 체대생으로 덩치도 좋았고 힘도 매우 쎈 편이였죠.
그런 그가 술에 취해 자고 있던 김보은 아버지 김영호를 깨웠고, 그녀의 아버지가 눈을 떠보자 식칼을 손에든
덩치 큰 남자가 자신의 몸위에 올라가 있었고, 무릎으로 양팔을 누른채 꼼짝달싹 못하게 제압하고 있었죠.

김영호가 저항을 했지만 역부족이였고, 이때 김진관이 김영호에게 말했습니다.
'보은이 더 이상 괴롭히지말고 나줘요.'
그러면서 그의 가슴을 쎄게 찌르게 됩니다. 이 칼은 심장에 바로 꽂혔고 김영호는 '윽' 소리만 지른채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되었죠.

앞서 형사가 아버지 상태를 보고 왔는데 살아 있다고 했었으나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사실 경찰은 처음부터 용의자로 김보은양을 의심하고 있었고 거짓 정보를 흘려 그녀를 떠보았던 것이죠.
사건으로 돌아와서 살인을 저지른 김보은과 김진관은 서둘러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죠.

강도를 당한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김영호의 양 다리를 테이프로 묶었고, 현금을 훔쳐간 듯 가져갔고
장롱, 서랍등 여러 군데 어지럽혀 강도처럼 보이게 꾸몄고 김보은양도 강도에게 당한것 처럼 보이기 위해
브레지어 끈도 끊어 놓았죠. 손목과 발에도 테이프를 감았습니다.

그녀는 묶인 상태로 힘겹게 옆집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집안은 어지럽혀져 있고 김영호는 칼에 찔린 채 이불위에 누워 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학생 딸 김양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긴 하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침작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김양의 말을 듣던 형사는 어딘가 의문점이 생겼죠.
그건 김양의 말 중 다큰 김양이 아버지와 한 이불을 덮고 한방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는 점이였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칼에 찔려 죽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딸은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의아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였죠.

그래서 경찰은 김영호는 죽었지만 살아있다고 말해 김양의 자백을 얻게 되죠.
잠시후 현장 감식반이 도착해서 지문과 족적을 발견했고 가족이 아닌 제 3자의 것으로 나오게 되고, 
그것이 바로 김진관의 것이였습니다.

사건 이틀만에 김보은양과 김진관군은 공범으로 모두 체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사건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입니다.

이둘이 작당하고 김영호를 죽이게 된 계기 그건 그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형사법에서 두고두고 회자 되고 있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김양과 피해자 의붓아버지의 관계에 주목해야 됩니다.
김양은 아주 어린나이에 친아버가 사망했고, 김양이 7살이 되던해에 그녀의 어머니는 김영호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영호는 충주 지방 검찰정에서 간부직을 맞고 있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나름잘 나갔던 사람입니다.
80년 시대상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딸을 키운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양의 어머니는 넉넉한 김영호와 재혼은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딸인 김양에게는 지옥의 시작이였죠.
김양이 9살이 되던 해부터 김영호가 악마와 같은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집에 없고 둘만 남아있는 시간 그는 9살 김양에게 유사 성행위를 시킵니다.
그 짓은 한두번에 끝나지 않았죠.

시간이 조금 지나 김양이 초경을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성폭행을 저질렸고,
처음엔 김양 어머니 몰래 저지르지만 어느날 이 추악한 짓은 들키고 말았죠.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그 계기로 아예 대놓고 성폭행을 행하게 됩니다.

아이가 혼자 목욕을 하고 있으면 같이 들어갔고, 또 김양이 생리하는 기간에도 예외는 없었죠.
심지어 양 옆에 김양의 어머니와 김양을 눕혀 놓고 번갈아 가며 성폭행을 하기도 했죠.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도 하고 음란 비디오를 틀어 놓고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습니다.

김양의 어머니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영호를 경찰에 몇번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완전한 방관자는 아니였지만 문제가 있었죠.
문제는 경찰이 집에 왔으나 김영호를 잡아가기는 커녕 꾸벅 인사만 하고 돌아갔죠.
당시 검찰의 위상은 대한민국의 하늘을 찔렀습니다.

근데 김영호는 검사는 아니고 검찰청에서 일하는 간부 그냥 공무원이였죠.
경찰들은 그럼에도 김영호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졌고, 당시 법무부 소속 직원의 범죄에는 경찰이 아닌 오직 검찰만이
수사 할 수 있다. 라고 명시 되어 있었죠.

그래서 김양의 어머니가 아무리 신고를 해도 희망은 없었죠.
그렇게 계속 좌절 했으며 시간은 무려 12년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김영호는 죄책감 하나 없이 김양이 지속적으로 성폭해 했고 괴롭혔습니다.

차라리 모녀가 그의 품에서 도망쳤으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선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죠.
상대가 지속적으로 극심한 공포감을 주고 거기에 또 무력함까지 심어 놓으면 피해자는
마치 노예의 심리 상태가 되어 아예 어느 순간 부터 도망칠 생각을 할 수 없다고 말이죠.

실제로 김영호는 툭하면 '너 허튼짓 하지마 우리나라 검찰 수사망 죄다 내손안에 있어'라는 말을 자주했죠.
행여나 김양의 어머니가 이혼을 시도하려고 했을땐 식칼을 가지고 와서 다 죽여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렸죠.
김양의 모녀는 도망가지 않은게 아닌 못한 것이죠.

어느덧 시간이 흘러 김양이 대학교 무용과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디어 김영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건 헛된 꿈이였습니다.

김영호 그 악마같은 인간은 보은양의 모든 행동을 통제 했습니다.
수업 시간표를 붙여 놓고 수업 시간 왜에는 기숙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며
주말엔 무조건 집으로 내려 와야만 했죠.

그때마다 김양은 또다시 김영호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런 보은양에게 사랑이 찾아왔고 그게 바로 김진관이였습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거죠.
하지만 연애 조차 결코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데이트는 고사하고 매일 김양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습니다.
이걸 눈치챈 남자친구 김진관군은 어느날 무슨 문제인지 집요하게 물었고
여기서 김양은 김군에게 모든걸 털어 놓게 됩니다.

모든 사실이라는 것은 그녀가 9살 때 부터 당해온 행동들이였고.
이걸 들은 김군은 안되겠다 김영호를 찾아가 연애를 허락을 받자, 지켜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게 되고,
그러면 더 이상 김영호가 김양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죠.

그 생각은 잘못 되었고 돌아온건 욕설과 협박이였습니다.
그래서 김군은 경찰에 신고하자라고 했지만 김양은 지난 12년 동안 그 짓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알고 있었고
그 둘은 좌절과 분노감을 느끼게 되었고, 오랫동안 고민하게 됩니다.
그 끝은 김영호를 살해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실이 들어나 감옥에 있던 김양은 법정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7개월간 감옥에서 지내온 시간이 지난 20년 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밤이 라는 시간이 이렇게 아름답다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김군 또한 이런 말을 남겼는데요.

'나는 보은이의 의붓아버지를 죽인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보은이를 살린 겁니다'

끔찍한 성폭행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버린 사건 당시 김군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 이곳저곳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한국 성폭력 상담소였는데 이들이 사건의 원인 부터 다시 검토를 했으며
사건을 공론화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이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22명의 변호사들이 나서게 됩니다.

제판을 진행되던중 검찰이 보여준 태도는 또 다시 큰 비난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재판 도중이였는데 검사가 보은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의붓아버지와의 관계를 피고인도 즐긴것 아닙니까?'

또 이런 질문도 있었죠.

'학교 성적이 우수했는데 그럼 생활이 지극히 정상적이였던것 아닙니까?'

이런 파렴치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변호사들은 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왜냐면 김보은양은 막강한 권력에 항거할 수 없고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죠.
이둘의 행동은 스스로 지키기 위한 정당 방위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80년대 대한민국 법정은 과연 어떤 판결을 내렸을 까요?
1992년 4월 청주 지방법원은 김보은과 김진관 살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합니다.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판사는 보은양이 그동안 당해온 말할 수 없는 피해상황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김진관에겐 징역 7년 김보은에겐 징역5년을 선고했고
항소심이 이루어 졌고 형량이 좀 낮춰졌다.

김군에겐 징역5년 김양에겐 징역3년과 집행유예 5년이 내려지게 됩니다.
이후 대법원을 통해 형은 그대로 확정이 됩니다.

이사건은 한국 사법부가 만들어진 이례 살인에 대해 최초로 집행유예를 선고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현재에서도 형사소송법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건으로 인해 암암리에 벌어지던 친족간 성범죄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친족 성범죄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건 거의 이사건이 시작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군이 복역을 마치고 나와서 그 두사람은 결국 결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함께 있으면 끔찍했던 그사건을 계속 떠올리게 될까봐 여서 라고 전해집니다.
한편 김보은양은 석방이 되자마자 김진관의 부모를 찾아가 울면서 빌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김진관의 부모는 '네 잘못이 아니다.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라고 다독여 주었죠.
이둘은 출소 후 계명을 했고 더이상의 근황은 알려 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 사건은 1994년 성폭력 범죄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법에 친족간에 의한 강간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비로소 친족간의 성폭력이 법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는 많이 좋아 졌을까요?
물음이 남는 사건이였습니다.

오늘 이사건의 내용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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