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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할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미제 살인 사건 블랙 달리아 사건입니다

 

블랙달리아  사건

1947년 1월 15일 수요일 아침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세 살배기 딸과 함께 한산한 레이머트 공원을 산책하던 한 여성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상체와 하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토막 난 여성의 시체를 공원 잔디 밭 위에서 발견한 것이죠.

시체의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어서 이른바 글래스고 스마일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빠져나간 탓에

시체의 피부는 유독 창백하고 새하얗게 변해있었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여성은 시체가 아니라 버려진 마네킹으로 착각할 정도였죠.

곧 시체임을 깨달은 여성은 경악에 차서 곧장 경찰에게 신고를 했습니다.

조사 결과 시체의 신원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22세의 여성 엘리자베스 쇼트였죠.

엘리자베스 쇼트가 생전에 검은 옷을 즐겨 입었고 달리아꽃을 머리에 장식했었다는 소문 때문에 이 사건에는 '블랙 달리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워낙 잔인한 데다 언론에까지 크게 보도되었다 보니 사건의 초동수사에만 시 경찰국을 포함해 여러 수사기관의 수사관 750명이 동원 되었습니다. 이 수많은 수사관들은 엘리자베스 쇼트를 살해한 범인과 증거를 찾기 위해 LA 전역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죠. 심지어 당시 시 참사 의원이엇던 로이드 데이비스가 살인범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 1만 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까지 걸었음에도 범인은커녕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고,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이 범인이라 주장했지만 모두 돈과 관심을 노리고 범인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였습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엘리자베스 쇼트를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것일까요?

 

엘리자베스 쇼트 그녀는 누구인가?

 

먼저 엘리자베스 쇼트가 어떤 사람인지 부터 알아보도록 하죠.

엘리자베스 쇼트는 1924년 7월 29일 생으로 미국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5냐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쇼트의 아버지 클레오 쇼트는 미니어처 골프 사업을 했는데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때 사업이

쫄딱 망해 가세가 기울게 되었습니다.1930년 어느 날 클레오 쇼트는 행방불명되었는데 찰스강의 다리 위에 차를 세워놓은 채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정황상 그가 찰스강에 투신했다고 믿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쇼트의 어미니 피비 쇼트 역시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살던 곳을 떠나 메드퍼드 시내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피비 쇼트는 회계일을 시작하여 가족을 부양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기관지염과 천식 발작 때문에 15살 때 폐 수술을 받긴 했지만 이것 말고는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적을 보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엘리자베스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였는데 이 무렵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여태 사망한 줄 알았던 남편으로부터 사과 편지를 받게 됩니다.

 

편지에는 자신이 사실 살아 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18세 였던 엘리자베스는 6살 이후로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주의 발레이오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샌프란시시코만에 있는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며 생활하게 되었죠.

 

하지만 오랜 시간 떨어져 산 간극을 좁힐 수 없었던 것일까요?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와 자주 논쟁을 벌이며 다투다가 결국 함께 산지 몇 달 만인 1943년 1월 아버지의 집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롬 포크에 위치한 군매점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친구들과 함께 살며 군인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했습니다.

 

1943년 중순에는 샌티바버라로 이사를 갔다가 미성년자 음주 혐의로 체포된 적도 있었죠. 이후로도 엘리자베스는 사망 전까지 3명의 남자를 더 만나게 되는데 그중 한명은 플로리다에서 만난 공군 장교 매튜 마이클 고든 주니어 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까지 약속할 만큼 깊은 사이로 발전했지만 안타깝게도 매튜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사별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플로리다에서 생활하며  육군항공대 중위 조셉 고든 피클링을 알게 되는데 1946년에는 조셉을 만나기 위해 로스엔젤레스로 이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사망 전까지 생애 마지막 6개월을 대부분 로스엔젤레스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할리우드 대로의 한 나이트클럽 뒤편의 월세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는 사후 배우 지망생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엘리자베스가 어떤 영화에도 출연한 적도 관련 직업을 가진 적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정말 배우 지망새이였는지 여부도 불분명 할 뿐이죠.

사망 약 일주일 전인 1947년 1월 9일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레드 맨리라는 이름의 불륜 관계인 남자와 샌디에이고로 여행을 떠났다가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옵니다.

 

로버트의 증언에 따르면 로버트는 엘리자베스를 시내에 있는 호텔에 내려 주었고 그날 오후 엘리자베스는 보스턴에서 온 여동생을 만날 예정이였습니다.그런데 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사라진 일주일

 

 

로버트와 헤어진 순간부터 엘리자베스의 행적은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엘리자베스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1월 9일부터 변사체로 발견된 1월 15일 사이의 일주일 동안 엘리자베스가 어디서 누구와 뭘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동안 엘리자베스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꽤 나타나긴 했지만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라진 1주일'이라고 부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일주일간 베일에 싸여 있던 엘리자베스는 1947년 1월 15일 아침에 로스엔젤레스 레이머트 공원의 공터에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앞서 말했듯 엘리자베스의 시신은 너무 잔혹하고 기괴한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또 엘리자베스 시신은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양손은 마치 항복자세로 들고 있었고,다리는 활짝 벌려진 채였습니다. 시체가 이렇게나 잔혼하게 훼손되었음에도 현장에서는 피 한방울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이곳으로 옮겨져 왔다고 생각할 수 있음을 뜻 합니다. 

 

검시관들은 변사체로 발견되기 약 10시간 전에 사망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사체는 사망 후에 절단 되었다고 드러났는데 절단 방식이 일종의 단서가 되었습니다. 시신은 마구잡이로 절단 된것이 아닌 1930년대에 하반신 절단술이라고 부르던 수술 기법과 같은 방식으로 절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범인이 의사이거나 최소 의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였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발견된 곳에서 가까운 남캘리포니아 의대에 영장을 발부하고 의대생들을 조사했는데 마땅한 용의자는 없었습니다.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언론은 기삿거리를 독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공원에서 발견된 기괴한 변사체가 엘리자베스로 밝혀졌을 때는 엘리자베스의 모친에게 연락을 하여 '딸이 미인 대회에서 수상했다'라고 거짓말을 하며 엘리자베스의 사생활을 캐냈을 정도 입니다.

 

만족할 만큼의 정보를 얻어낸 뒤에서야 사실은 엘리자베스가 살해당했다고 밝혔고, 이렇게 얻어낸 정보를 제멋대로 엘리자베스의 삶을 각색해 자극적인 기사를 썼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가 마지막에 발견됬을때 입은 옷은 검정색 양장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트한 스커트와 비치는 블라우스로 둔갑시키는 형태였습니다. 언론은 멋대로 엘리자베스 사건에 블랙달리아 라는 별명을 붙였고 그녀가 콜걸이였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레즈비언 이였다는 소문까지 돌았었죠.

 

악의적이고 제멋대로인 기사들 덕분에 사건의 본질이 흐려졌으며 수사는 난항을 겪었습니다.

1947년 봄이 지나자 블랙 달리아 사건은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은 미제사건이 되었습니다.

이후 사건을 맡았던 형사가 믿는 용의자도 나왔으며 조지호델이하는 의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진범이라고 밝혔으나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뒤에라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성한 소문만 남아 블랙 달리아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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